헬기 사격과 생존자의 죄책감 재조명…“역사적 사실의 재현 막아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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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BS 드라마 ‘닥터 X: 하얀 마피아의 시대’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총상을 입은 피해자의 사연을 다룬 장면. (사진=SBS) |
영화 ‘암살자(들)’에 이어 드라마 ‘닥터 X’를 둘러싸고 과도한 행위들이 반복되고 있다. 두 작품은 장르와 소재는 다르지만 한국 현대사를 본격적으로 다뤘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았다는 이유로 드라마 제작진과 배우에게까지 압박이 가해지는 현실은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 방영 당시와 비교할 때 역사적 퇴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송지나 작가가 집필하고 김종학 감독이 연출한 ‘모래시계’는 5·18 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당시에는 5·18이 발생한 지 15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신군부 책임자들에 대한 수사와 사법적 심판이 본격화하던 때였다.
방영 당시 신군부 인사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방송 시점이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제기했다. 당시 안전기획부가 방송사에 무형의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모래시계’는 끝까지 방영됐고, 최고 시청률 64.5%라는 기록을 세웠다. 단순한 흥행을 넘어 국민적 각성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분노에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는 반응이 PC통신을 장식했다. 드라마는 신군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 형성에도 기여했고,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공감대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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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방영된 SBS 드라마 ‘모래시계’의 5·18 민주화운동 재현 장면. (사진=SBS 방송화면) |
그런데 2026년, 5·18을 다룬 드라마 ‘닥터 X’를 향해 방영 중단 청원과 민원, 정치적 압박성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누리꾼들은 주연 배우를 향해 인격 모독과 혐오 표현까지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30여 년 전 신군부 측이 ‘모래시계’에 가했던 압박을 떠올리게 한다. 오히려 그 수위가 더 심각하다는 점에서 역사적 퇴행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물론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작품의 완성도나 역사적 재현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다.
그러나 비판이 제작 중단을 요구하거나 규제기관의 권한을 동원해 창작 환경에 부담을 주는 수준으로 나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는 표현의 자유뿐 아니라 예술 창작과 문화 향유에 관한 국민의 권리까지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닥터 X’에 5·18이 등장하는 것이 뜬금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주인공 계수정(김지원)은 세계 분쟁지역을 돌며 의료봉사를 해온 인물이다. 전쟁과 분쟁 속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치료하고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런 계수정이 마주하는 환자가 오상범(하성광)이다. 오상범은 어린 시절 광주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으로 머릿속에 총알이 박힌 채 살아남았고, 이후 환청과 환상, 극심한 두통에 시달려온 인물이다.
계수정에게 오상범은 자신이 분쟁지역에서 마주했던 어린 생존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다른 나라의 전쟁터에서 목격했던 민간인의 고통이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환자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에피소드는 의료 드라마의 본질과 동떨어진 설정이 아니다. 오히려 남들이 외면하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계수정의 캐릭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의료 드라마가 사회적·역사적 사건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점을 돌아볼 수는 있어도, 이를 다뤘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부당하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에서 헬기 사격은 중요한 역사적 쟁점이다.
신군부는 광주에서의 무력 진압을 폭도들에 대한 자위권 행사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헬기 사격은 단순한 현장 대응이 아니라 조직적인 무력 사용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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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전일빌딩245에 남아 있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탄흔. (사진=연합뉴스) |
광주 전일빌딩에서는 245발의 탄흔이 확인됐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과 관련 조사, 법원의 판단을 통해 헬기 사격의 실체가 드러났다. 전두환은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발언을 부정했지만, 법원은 관련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한 바 있다.
‘닥터 X’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상범이 품고 있는 죄책감이다. 그는 헬기 사격 당시 형이 목숨을 바쳐 자신을 보호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고통받는다.
이 죄책감은 단순히 한 개인의 상처에 머무르지 않는다.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미안함이자, 광주의 비극을 알지 못했거나 도와주지 못했던 사람들의 죄책감을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닥터 X’의 5·18 에피소드를 작위적인 설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의료 드라마라는 장르를 통해 역사적 상처와 인간의 고통을 연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최근 ‘닥터 X’를 향한 과도한 공격은 단순한 작품 비평의 범위를 넘어선다. 현대사를 다루는 작품의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에게 부담을 주고, 앞으로 비슷한 소재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을 약화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의 표현 방식은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밝혀진 역사적 사실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것까지 막으려 한다면 민주사회가 지켜야 할 창작의 자유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압박은 역설적으로 작품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역사적 사실을 다룬 콘텐츠를 억압하려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해당 작품을 찾아보고, 관련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해법은 분명하다. 작품을 자유롭게 제작하고 방영하며, 시청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비평하면 된다.
5·18 민주화운동은 국가폭력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된 역사적 사건이다. 이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부정하거나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민주사회는 불편한 역사를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그 역사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한다.
‘닥터 X’를 향한 겁박이 우려스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5·18을 다룬 작품이 자유롭게 만들어지고 방영될 수 있는 사회야말로 민주주의가 진전된 사회다.
역사를 다룬다는 이유로 작품과 배우를 공격하는 행태는 더 이상 반복돼서는 안 된다. 역사적 진실을 기억하고 표현할 자유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민주사회가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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